3월 1일 소그룹 성경 나눔 해설
3월 1일 소그룹 성경 나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여호수아 9:16-27
l 흐름 살펴보기
모세의 죽음과 동시에 이스라엘은 역사의 거대한 도전에 직면합니다. 출애굽과
광야 생활 내내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지도자가 죽고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가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드디어
가나안 진입을 시도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철저하게 율법에 순종하며 정복 전쟁을 거룩한 하나님의
전쟁으로 준비했습니다. 여리고성과 아이성의 함락은 이 전쟁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증거였습니다. 그러자 소식을 들은 가나안의 모든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격퇴하기 위해 힘을 결집하여 연합군을 구성합니다. 그런데 상황을 전혀 다르게 인식한 한 성읍이 있었습니다. 기브온
주민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맞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신을 보내면서
아주 먼 곳의 성읍에서 온 것처럼 여호수아를 속여 이스라엘과 화친언약을 맺는데 성공합니다.
l 말씀 살펴보기
1.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사흘간 행군하다가 알게 된 사실은 무엇입니까?(16) 이 사실이 그들에게 가져온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신20:10-11, 20:16-18)
ð 기브온 사람들과
화친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은, 사흘이 지나서야 그들이 먼 곳에서 온 이들이 아니라 가나안 경내에 있는
민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어쨌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사단을 파견했고 그들은 사흘 길을 걸어 기브온 사람들의 정체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확인한 기브온 사람들의 거주지는 네 개의 성읍으로서, 기브온 성과 세 개의 위성 성읍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 사실로
미루어볼 때, 이들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적은 세력이 아니었습니다.
이 도시들은 모두 예루살렘의 북서쪽으로 8-15km에 떨어진 위치에 있습니다.
ð 기브온 사람들이
가나안 경내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스라엘은 혼란에 빠집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율법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먼 곳의 민족과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화친조약을 맺을 수 있었지만(신20:10-11),
가나안 지역 내의 민족과는 결코 언약을 맺지 않아야 했기(신20:16-18)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브온 사람들의 화친 제안에 충분히
신중하지 못했고, 그 결과 맺지 않아야 할 언약을 맺고 만 것입니다(14).
2. 기브온이
가나안 지역 내에 있는 성이라는 사실은 이스라엘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초래했습니다. 기브온을 공격하는 것도, 공격하지 않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겠습니까?
ð 우리는 이
딜레마에 대한 해결이 매우 쉽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기브온과의 언약은 1. 속아서 맺은 정당하지 않은 언약이며 2.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이지만 그들과의 언약은 인간 사이의 언약이기에, 기브온을 공격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결론
내리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ð 물론 속아서
맺게 된 언약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것이 오늘날의 상식입니다. 하지만 고대 근동 문화는 이미 체결된
언약이라면 그것 자체로서 독립적인 힘을 가진다고 여겼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율법을 가진 이스라엘은 그
어떤 민족보다도 더 언약을 엄중하게 여겼습니다(출20:7, 레19:12).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 백성들의 신실함을 동시에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에(18,19),
그 언약을 깨뜨리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부정하는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3. 여호수아가
이 사실을 알고서 내린 조치는 무엇이었습니까?(23, 26-27) 이 조치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ð 어떤 쪽을
선택해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는 가장 지혜로운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놀랍게도 기브온을 살리도록 명령합니다(26). 여호수아의 이 결정은 이후 성경의 흐름으로 볼 때 정당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기브온 사람들은 한 번도 이스라엘을 위험에 빠뜨린 적이 없고, 오히려 저 훗날 포로 귀환기의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에도 신실한 이스라엘의 일원으로써 예루살렘 재건에 동역하는
모습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느3:7). 게다가 다윗
시대에 삼 년 동안 지속된 기근은 사울 왕가가 이 언약을 지키지 않고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이라는 점도 이 사실을 입증합니다(삼하21:1-2). 눈에 보이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신실하지 않은 사람이
과연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진심으로 신실할 수 있을까요?
이
장면이 우리에게 놀라운 이유는, 사람과의 언약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우선이라는 종교적인 상식이
부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문자적인 적용이 때때로 하나님의 뜻과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갈등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과연 우리가 그 명령 뒤에 놓인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을 따라 행하는 것인지를 신중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ð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과의 언약을 깨뜨리지 않고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을 발견해 냅니다. 그것은 기브온
사람들을 살리되 그들을 성전 노동자로 삼는 것입니다(23).
여호수아의
이 조치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거민들을 모두 멸하거나 내쫓으라고 말씀하신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과 언약을 맺고 그들을 종으로 삼는 일을 하나님께서 금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악한 종교와 문화를
배울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거민들이 성전, 성소를
중심으로 생활하면서 여호와의 집을 위해서 일하는 신분이 된다면, 그들은 도리어 거룩한 여호와 신앙의
영향 아래에 놓이게 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영적 정체성에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이 조치는 가나안의 다른 민족들에는 적용해서는 안됩니다. 이 조치는 이스라엘이 속아서 맺은 언약이라는
곤란한 상황에 대한 자구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전이 수용할 수 있는 종의 숫자도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4. 기브온
주민들이 자신들의 거짓이 드러났을 때 보인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의 태도를 볼 때 그들의 성품은
어떠합니까?
ð 여호수아가
기브온 사람들을 책망할 때, 놀랍게도 그들은 너무도 겸허한 반응을 보입니다. 언약을 내세워 당당히 자신들의 요구를 내세울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며(24) 지금이라도 이스라엘이 원하는 대로 자신들을
처분해 달라고 말합니다(25).
특히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고 말합니다. 사실 기브온은 이스라엘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겼던 아이성보다도 훨씬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10:2). 그렇다면 그들은 다른
가나안 민족들과 연합군을 형성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가나안 모든
땅이 이스라엘에게 넘어간 것처럼 여깁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브온
사람들의 태도는 여리고 멸망에서 살아남았던 라합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리고의 기생이었던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하나님의 소문을 듣고 이미 여리고에 희망이 없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돕습니다. 기브온도, 라합도, 가나안
민족들 사이에 있었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를 가졌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정체성은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로 형성된다고 보았을 때, 라합과 기브온은 이스라엘의 민족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참으로 복잡합니다. 아무리 지혜롭게 결정하려고 해도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파악하고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 자체는 매우 명료해 보이지만, 우리 삶의 그런 복잡성 때문에 율법의 단순한 적용이 불가능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성품인 신실함을 따를 것인지, 가나안 지역 내의 모든 민족을
멸하라는 명령에 따를 것인지, 진퇴양난에 빠진 이스라엘처럼 말입니다.
그때 여호수아는 연약에 신실하기로 결정하고, 그들을 살리는 대신 그들이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가도록 만듭니다. 예수님의 율법 해석이 언제나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본래 복적을 성취하는 방식이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l 삶 속으로
1. 하나님의
율법을 문자적으로 적용하다가 후회했던 경험이 있습니까? 있다면 왜 후회했는지, 그 후회는 합당한지 이야기해 봅시다.
2. 율법의
문자적인 적용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더 높은 원칙으로 정할 때, 우리가 빠지기 쉬운 잘못은
무엇입니까?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ð ‘율법주의’가 예수님 시대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 영향력을 잃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고 신뢰하지 못할 존재인지를 우리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율법이 문자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 율법 때문에 가로막혔던 우리의 죄를 정당화할 유혹을 느낍니다. 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죄를 추구하면서도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외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율법주의로 돌아가 머무르면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모습을 용납하실 수 없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율법주의’도 ‘무율법주의적
방탕함’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시에 묵상해야 합니다. 율법을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죄성을 직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또한
교회의 성도들끼리 서로의 삶을 점검해 주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개인주의’라는 가치가 마치 절대적인 것처럼 여기며 그것을 보장하기 위해 영적인 하나됨조차 포기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무율법주의적 방종에 빠져 살아도 그 누구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책망하지도 권면하지도 않는 것이 오늘
우리의 문제입니다. 영적인 권면은 개인의 자격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 공동체는 어떤 부분에서 더
성장해야 할까요? 그리고 어떤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