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 큐티 2017년 3월 19일 소그룹 나눔 해설
3월 19일
언약궤와 속죄소를 만드는 법
출 25:10-22
l 흐름 살펴보기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백성들을 시내 산에서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십계명과 그 사례들인 ‘언약의 책’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기꺼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언약체결식을 진행하시고, 이 언약의 실현을
위해 성막을 준비하도록 모세를 시내 산으로 불러올리십니다.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은 이 성막 건설을
위해 필요한 물품들의 목록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서 그 예물들을 받되,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만 받으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만들어야 하는 성물에 관한 첫 번째 설명입니다.
l 성경 속으로
1.
언약궤를 만드는
방법은 무척 단순해 보입니다. 그 크기는 어떠합니까? 그런데
금고리를 만들어 붙인 다음에 채를 꿰고 채를 빼지 말라는 말씀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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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궤는 아카시아 나무로 틀을 만들고 금을 입힌 상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궤의 규격을 길이 두 자 반, 너비 한 자 반, 높이 한 자 반으로 정해 주셨습니다. ‘자’로 번역된 ‘규빗’의 크기가 45cm라는 점을 감안하면 미터법으로는 113 X 68 X 68cm 입니다. 높이와 너비는 성인 남자의 허벅지 중간 까지의 높이 혹은 팔 길이 정도가 될 것이고, 길이는 한 쪽 어깨에서 반대 쪽 손 끝까지의 길이 정도가 될 것입니다. 언약궤가
가진 의미와 중요성을 고려하면 그 크기는 보잘것없어 보일 정도입니다. 하지만 애초에 이 땅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임재를 담을 자격은 없습니다. 오직 피조세계 안으로 들어오셔서 당신의 백성과 함께
동행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사66:1,2;
삼하7:6,7; 행7:48-50). 그런 면에서
언약궤의 크기는 두 사람이 들기에 적당하도록 정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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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하나님께서는 언약궤의 양쪽에 두 개씩의 금고리를 만들어 달고, 금으로 입힌 아카시아 나무 막대(채)를 거기에 끼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옮기기에 좋은 언약궤의 크기처럼, 운반을 위한 이 부속물들은 약속의 땅을 향한 그들의 여정을 하나님께서 이끄신다는 사실과 깊은 관계를 가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언약궤의 채를 만드는 법을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끼워두고 빼지 말라는 당부를 덧붙이십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진을 치고 성막을 세우면
다시 출발하기 전까지는 채를 빼 두어도 됩니다. 어쩌면 그 편이 더 단정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채를 빼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면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의미는 언약궤와 그 위에 좌정하시는 야훼 하나님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종교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이 한 지역을 다스린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역에 얽매이는 지역신, 부족신이
아니라 초월적인 하나님이십니다. 두 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임재의 본질이 ‘동행’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종교적인 한 장소로 그 백성들을 불러 모으시지 않습니다. 당신의 백성들과 같은 목표를 공유하시고
그 목표를 향해 함께 움직이십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진을 치고 언약궤를 지성소에 둘 때마다 이
진리를 되새길 수 있었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가진 의미를 가르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2.
언약궤를 만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계명이 기록된 증거판을 넣게 될 것입니다. 언약궤의 뚜껑 역할을 할 속죄판은 어떻게
만들어야 합니까? (17-20절) 그룹의 형태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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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궤는 위가 열려 있는 5개의 면으로 된 상자입니다. 속죄판은 뚜껑처럼 그 위에 올려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속죄판의 크기는
당연히 언약궤와 같은 길이, 너비로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아카시아 나무에 금을 입힌 언약궤와 달리, 속죄판은 순금을 두들겨서 만듭니다. 그 이유는 속죄판이 단순한 뚜껑이 아니라 윗부분에 두 개의 그룹 형상이 단조된 것으로 만들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그룹의 형상은 속죄판의 양편에서 서로 마주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날개로 속죄판을 덮고 얼굴을 아래로 숙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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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cherub)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반영하는 천사로서 하나님의 보좌를 지키는 역할과 섬기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날개를
가지고 있다는 것 외에는 그 모습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룹의 속죄판의 일부로서 세워졌다는
사실과 그들이 얼굴을 숙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속죄판이 하나님께서 좌정하시는 보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증거판을 넣은
언약궤 위에 속죄판을 얹으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까? (22) 그 금 뚜껑의 이름이 ‘속죄판’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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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판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나시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만남은 아무런 조건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속죄판에서 만나고 말씀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맥락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그것은 속죄판 아래에 언약궤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 증거판이 있다는 것입니다(21절).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과 교제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언약을 기초로 이루어집니다. 증거판은 십계명에 대한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언약의 계약서이기 때문입니다(24: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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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판은 히브리어로 ‘카포레트’라고 합니다. 이는 ‘덮는다’라는 의미의 동사 ‘카파르’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이것을 그저 언약궤를 덮는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카파르’라는
동사는 구약성경의 많은 곳에서 속죄, 화해, 거룩하게 씻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보좌인 속죄판에 이런 의미가 없다면 하나님의 임재는 이스라엘에게 재앙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의는 이스라엘의 심판과 멸망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와 속죄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속죄판은 ‘시은좌’,
곧 ‘은혜를 베푸시는 자리’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 은혜는 이스라엘의 죄를 방치하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증거판이 상징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을
전제로 합니다.
4.
언약궤와 속죄소가
결합된 모습은 어떠할까요? 이 모습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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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궤와 속죄소가 같이 놓일 때, 이 둘은 완전한
하나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때 언약궤는 단순히 증거판을 담는 상자가 아니라 하나님 은혜의 기초가
될 것이고, 속죄소는 이스라엘 중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타협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이 모습은 하나님의 찾아오심에 담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거룩하심을 알려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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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조차도 자신을 위한 수호신이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이용하려 들기도 하고 주제넘은 교만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자신이 가지려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에게 구원은 없습니다. 복된 삶은 불가능합니다. 언약궤와
속죄소의 의미와 그 관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되 당신의 거룩하심은 조금도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l 삶 속으로
1.
속죄소의 또
다른 이름은 ‘시은좌’입니다. 은혜를 베푸시는 의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그러나 언약궤와 속죄소가 결합된 모습으로 볼 때, 우리가 은혜를
구하며 동시에 염두에 둬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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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신앙의 모습은 ‘은혜’를 방패삼아 온갖 죄악을
방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앉아서는 간절히 은혜를 구하지만, 그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나는 스프링처럼 교만한 얼굴로 돌아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죄와 하나님의 은혜는 마치 영원히 만나지 않는 기차의 양 레일처럼 격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언약궤와 그 위의 시은소를 떠올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 자체만으로 독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우리의 순종 위에서만
가능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순종이 하나님의 은혜를 만들어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아들이는 관계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대속물이시면서 동시에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 나라가 우리 내면에, 일상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헌신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