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큐티 3월 22일 소그룹 성경 나눔 해설
3월 22일
도피성과 하나님의 의
여호수아 20:1-9
l 흐름 살펴보기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은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사명을 수행했습니다. 그들의 정복 전쟁의 목적이 단순한 침략이나 약탈이 아니라 그 땅에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ㅏㅓㅡㅕㅜ들이
그곳에 정착할 수 있도록 지역을 할당한 것입니다. 요단 서편에 9개
반의 지파가 제비뽑기를 통해 땅을 분배 받으면서 여호수아의 모든 사명이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아직 남은 것이 있습니다. 도피성과 레위지파의 성읍을 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l 말씀 살펴보기
1.
도피성은 누구를
누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준비됩니까?(2,3)
ð 도피성은
실수로 사람을 죽게 한 사람이 ‘피의 보복자’로부터 피하기
위해 지정된 곳입니다(3).
ð ‘피의 보복자’는 가문에 속한 사람의 권리를 가족, 친척들이 함께 보호해 주어야 하는 법적인 책임과 관련이 있습니다. 룻기에서
보아스가 룻과 결혼하면서 그녀를 보호하고 후손을 얻게 해 준 일이 그 대표적인 일입니다. 이것을 ‘고엘’이라 하는데, 이것은
대를 이어주는 일뿐만 아니라 억울한 피해나 죽음에 대한 보복도 포함합니다. 요압이 압살롬의 복권을 위해
꾸민 ‘드고아 여인의 항소’에 등장하는 여인의 이야기는 ‘피의 보복자’에 대한 선명한 사례입니다(삼하14:7).
2.
보복 자체가
금지되지는 않는 것은, 고대 사회는 정교한 치안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가까운 사람의 보복이 경찰력의 역할을 어느 정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복을 통한 질서의 유지는 치명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ð ‘피의 보복자’의 보복행위가 무제한적으로 허용된다면, 이 보복은 원한의 악순환을 낳을 수 있습니다.
5절은 사람을 죽인 자의 마음을 지배한 것이 무엇인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여 살인을 범한 자가 다른 이의 미움을 받아 죽는 것은 일종의 정의일 수 있습니다. 이때는 ‘피의 보복’이
정의의 균형을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도성이 없이 실수로 누군가를 죽게 했을 경우, 그 죄는 의도적인 살인의 경우와는 같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의도성이 없었다 할지라도, 희생자의 가족들은 분노와 미움에 사로잡혀 복수하려 할 것입니다. 고의성이 없었음을 입증하려 해도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경우에는 당연히 객관적인 상황판단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피의 보복이 이루어진다면
정의의 균형은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피의 보복자는 사실상 더 큰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실수로 사람을 죽게 한 사람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십니까?(5) 하나님께서는 똑 같이 사람이 죽게 되더라도
무엇에 따라 그것을 다르게 대하십니까?
ð 하나님께서는
실수로 사람을 죽게 한 사람은 보복자로부터 보호받기를 원하십니다.
도피성에 대한 규정은 의도적인 살인을 범한 자와 과실로 인한
살인을 범한 자를 모두 ‘살인자’라 일컫기는 합니다(5). 억울한 죽음이 발생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는 결과만을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치 않은 죽음이 가져온 분노와 절망을
인정하시면서도, 살인한 자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에 따라 그를 보호하기도 하시고 심판하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유가족들의 마음은 헤아리지 않으신다고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이 땅의 모든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노아 홍수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육식을 하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께서는 고기를 먹되 피째 먹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시면서 모든 생명이 하나님의 것임을 분명히
하도록 하셨습니다(창9:3-5). 요나 선지자가 자신의 박넝쿨이
죽은 일로 하나님을 원망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도 모든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욘2:10-11). 그러므로 살인은 유가족들에게 피해를 끼친 일이면서 그보다 더 깊게 하나님께 피해를 끼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살피시고 그 동기에 따라 다르게 대하시는 이유는, 더 큰 폭력과 죄악이 깃드는 것을 막으시기 위해서입니다.
4. 큐티책이나
다른 성경지도책에 실린 가나안 지도를 보면서 도피성의 위치를 확인해 보십시오. 그 위치는 어떠합니까?
ð 도피성은
요단강 동편에 3개, 서편에 3개가 설치됩니다(20:7,8). 그 위치는 과실치사자가 어디에서 출발하든지
하루 만에 도착할 수 있도록 모든 곳으로부터 50km 이내에 위치하도록 지정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도피성에 몸을 피하고 재판을 받기도 전에 피의 보복자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대인들의 전승에 따르면 도피성으로 향하는 길은 군데 군데 팻말이 세워져 있고 그 길이 잘 닦여 있어서, 그 곳으로 향하는 사람이 길을 잃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각 지파들의 토지
분배가 완료된 것으로 여호수아의 사명이 다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도피성의 설치를 통해 이스라엘에
억울한 보복이 악순환되는 것을 막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든 죽음을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음 자체는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그 죽음의
원인이 우연한 실수인지, 아니면 미움과 분노라는 인간 악의 실현인지를 분명하게 구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백성들의 사회가 참으로 정의롭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l 삶 속으로
1. 우리
공동체 안에서는 주로 어떤 일들로 지체들이 억울함을 느끼게 됩니까? 그 억울함이 반복되거나 악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치가 필요할까요?
ð 이 땅에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불행한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그 누구도 고통받지 않고 억울한 피해를 입지
않는 것이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이지만,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완전하게 이루시기
전까지는 그런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됩니다. 교회라고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에게도 불행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음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견하시고 그 대책을 마련하게 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안식의
땅을 주었으니, 땅을 얻은 인간들은 이제 완벽하게 살아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세상에서와 같은 불미스러운 일들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더 이상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사단의 회라고 할 만큼 십자가 신앙을 떠나 탐욕과 성공 신화에
사로잡힌 이들이 없지 않습니다. 교회 내의 재정적인, 성적인
추문들이 우리의 가슴을 멍들게 합니다. 그러나 눈을 감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교회 내에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일들의 이야기가 들리면, 그 사실을 모른 척
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 쉽습니다. 교회는 다르다는 생각에 여전히 머무르고만 싶어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구별됨은 그런 태도로는 빚어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외면으로 인해 억울한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상처가 이토록
깊어진 것은 그런 태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일어나는 고통스러운 일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회에서도 억울한 자들이 없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교회가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보호해주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요?
ð 도피성은
여러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하지만 그 목적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장차 완전하게 이루어질 회복을 현실 사회 속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실현시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도피성이 추구하는 가치를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우리 사회 속에 실현시키려는 노력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 분명합니다.
ð 도피성 제도에서
눈 여겨 보아야 할 점은, ‘미움이 원인이 된 살인’과 ‘실수로 인한 살인’을 그 동기로 구분했다는 점입니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동기에 대해서는 그 판결도 도덕적인 책임을 묻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도덕적으로 책임을 묻기 어려운 ‘실수’에 대해서는 다른 기준을 적용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우리 문화에서도 사실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었는데도 도덕적인 책임을 요구하는 경우들이 없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순간적인 판단의 실수로 파산하여 모든 것을 잃고 거리로 내몰리게
된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판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직장에서 업무의 미숙함을 보인 사람을 그 능력에 있어서
판단할 수는 있지만, 그 인격까지 무시하는 문화를 당연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복음에는 그런 사회적 낙인으로 절망한 사람들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그런 사람들을 품어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