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큐티 2015년 5월 24일 소그룹 성경 나눔 해설

524일 소그룹 성경 나눔

안디옥 교회 이야기

11:25-30

l  흐름 살펴보기


유대인들에게만 전해지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스데반 순교를 기점으로 한 대대적인 박해를 계기로 이방인들에게도 조금씩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교회는 점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흩어진 이들이 수리아 지방 안디옥에도 이르렀고, 이 곳에서도 이방인들에게 주 예수가 전파되었으며, 예루살렘 교회는 이 교회를 돕도록 바나바를 파송했습니다. 바나바가 오기 이전에도 수많은 사람이 주께로 돌이키는 역사가 있었고, 바나바의 가세는 여기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안디옥에 모인 교회는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함께 예배드리는 최초의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함께 살펴볼 본문은 이 첫 교회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l  말씀 살펴보기


1.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던 바나바가 다소까지 가서 사울을 찾아 데려와 안디옥 교회에서 함께 사역하였다는 데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ð  예루살렘교회가 안디옥 교회에 파송한 사역자 바나바는 착하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고 사도행전은 전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안디옥 교회는 수적으로 크게 성장했습니다(11:24).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에서 바나바라는 개인을 주목하고 높이려는 충동을 쉽게 느낍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런 우리의 성향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은 이 이야기에 곧이어 바나바가 사울을 동역자로 초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입니다. , 바나바의 믿음과 성령충만함, 그로 인한 사역의 열매가 바울과의 동역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ð  성경적인 선함, 믿음, 성령 충만함은 신앙의 개인적인 영웅을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영적인 민감함은 다른 성도의 사명과 은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공동체적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나의 믿음과 성령충만함에 대한 관심은 자폐적인 내적 성찰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나의 종교적 실천에만 집착하지 말고 우리를 함께 부르신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 부르심에 반응하는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착하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으로서 교회를 온전히 세워갈 수 있습니다.

2.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얻은 칭호는 무엇입니까? (26) 이 칭호는 안디옥 교회에 대해 어떤 점들을 연볼 수 있게 해 줍니까?

ð  사도행전은 이제까지 그리스도인들을 제자들’(6:1), ‘성도들’(9:13), ‘형제들’(1:16; 9:30), ‘믿는 사람들’(10:45), ‘구원을 받는사람들(2:47), 그리고 도를 믿는사람들(9:2)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가 최초로 사용된 곳이 바로 안디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칭호가 그들 스스로가 아니라 안디옥 시민들이 붙여준 것이었다는 사실(‘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ð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는 당시에 헤롯인’(Herodianoi), ‘카이사르인’(Kaisarianoi)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먼저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은 헤롯이나 카이사르와 같은 당대 최고의 권력자보다 예수님을 더 높이고 의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종교적인 의미로만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안디옥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들의 일상은 삶의 모든 구체적인 맥락에서 늘 그리스도를 의식하며 그분께 충성을 바치는 삶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그들이 예수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점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뜻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메시아 도당’, ‘메시아파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안디옥 교회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실제로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ð  이 사실들로 미루어볼 때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받은 안디옥 교회는 특정 종교를 택한 사람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방식과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3.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 때, 안디옥 교회는 어떤 결정을 내립니까? (11:29-30) 이 결정의 의미는 어떤 면에서 중요할까요?

ð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라고 말했을 때, 안디옥 교회는 유대에 사는 형제, 곧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힘을 다해 헌금하기로 결정합니다.
ð  글라우디오 황제 시대(AD41~54)에 로마는 곳곳에서 흉작과 기근이 이어졌습니다. 특히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헬레나 여왕이 많은 양의 옥수수와 무화과를 사서 나누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양식을 조달할 수 없어 죽어갔던 큰 기근에 대해 기록하고 있기도 합니다.
ð  우리는 어려움이 닥치면 그 어려움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특히 기근, 불황과 같은 현실에 빠져들면 그 현실이 바뀌기 전까지는 내 손에 쥔 것을 아무도 빼앗지 못하도록 단단히 움켜쥐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아마도 기근은 안디옥 교회보다는 예루살렘 교회에 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안디옥 지역은 흉년의 피해를 겪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국 전체가 산발적으로 흉작을 경험하고 있었다면 안디옥에도 언제 그런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로 한 안디옥 교회의 결정은 그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남으로 여기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각각 그 힘대로라는 말은 조금이라도 덜 내어놓기 위한 핑계가 아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자신들의 모든 힘을 다 바쳐 예루살렘 교회를 기근으로부터 건져내려 노력했습니다. 이 두 교회는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한 가족이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파송을 받아 말씀을 들고 안디옥 교회로 온 바나바와 사울은 이제 헌금 주머니를 가지고 안디옥의 파송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이제 갓 시작한 교회 공동체에 속한 그들에게 선포된 예언의 말씀은 불안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더 크게 하였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언의 말씀은 앞으로 힘든 시간이 닥쳐오니 제 앞가림 잘하고 물질을 잘 저축해서 내일을 대비하라는 메시지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새로 시작한 안디옥 공동체는 이 상황에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지키고 보존하고 유지하는 데 주력하지 않고, 더 힘들고 어려운 공동체를 돕기 위해 나누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교회가 왜 존재하는지를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생겨난 교회를 보존하고 유지하느라 급급해진 것 같습니다.

l  삶을 향하여


1.     작년 12, 누군가가 임박한 전쟁을 예언하여 작은 소동을 일으킨 일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교회 역사에 수도 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언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 이야기해 봅시다.

ð  2014년 하반기 한국 교회는 12월에 전쟁이 일어난다며 예언집회들을 하고 다닌 홍혜선이라는 사람 때문에 큰 곤혹을 겪었습니다. 이 소동으로 어떤 교회들은 필리핀으로, 미국으로 집단 망명을 가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과 이 사건은 환란에 대한 예언이라는 공통점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 반응은 완전히 다릅니다. 자신들만 살겠다고 이 땅을 버리고 도망한 그들과 달리 안디옥 교회는 온 힘을 바쳐 예루살렘 교회를 도왔습니다.


2.     오늘날 교회들의 경쟁과 단절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데 가장 큰 장애물 중의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서,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런 아름다운 교회의 하나됨을 이루어낼 수 있을지 이야기해 봅시다.


ð  중앙집중적인 로마 가톨릭뿐만 아니라 개신교도 원래는 교회의 하나됨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종교개혁의 주역인 루터와 칼빈도 처음부터 교회를 분열시킬 마음은 추호도 없었던 것입니다. 교황청의 완고한 태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분열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그들의 가르침은 교회의 하나됨은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지켜내어야 하는 교회됨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미국 교회는 마치 시장경제에서의 기업들처럼 교회들이 서로 경쟁하며 성장하는 흐름이 자연스레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교회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한국교회도 분열을 거듭하며 경쟁하는 흐름을 큰 저항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효율적인 양적 성장을 이루어냈지만 그리스도의 몸된 모든 교회의 하나됨이라는 가치는 낯선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가 보여준 모범은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입니다. 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도 서로 의심하고 반목하는 현실을 당연시하는 것은 가정의 심각한 갈등을 방치하면서도 우리 가족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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