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큐티 2016년 4월 17일 소그룹 성경 나눔 해설
4월 17일(주일) 소그룹 성경 나눔
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스가랴 5:1-11
l
흐름 살펴보기
스가랴의 앞 부분에는 여덟개의 환상이 나옵니다. 이 중에서 첫 번째(1:7-17)와 여덟번
째(6:1-8) 환상이 세상을 두루 돌아보는 말들에 관한 주제를 반복하며 전체의 틀을 이룹니다. 이 여덟 개의 환상들은 전체적으로 예루살렘의 회복에
관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환상은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위로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라”라는 말씀을 끝나며(1:17) 마지막
여덟번 째 환상 또한 갈등과 전쟁을 대표한 지역인 북쪽에서 쉬게 되는 하나님의 영에 대한 말씀으로 끝납니다(6:8). 그런데 이러한 회복의 환상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만 담겨있지 않습니다. 죄와 악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 또한 담겨 있습니다. 회복에는 잘못을 처리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그러한 주제를
담고 있는 것이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환상인 5:1-11입니다. 두 환상의 주제는 모두 악과 악인에 대한 심판입니다.
l
성경 속으로
1.
오늘 본문에는 스가랴가 본 두
개의 환상이 나옵니다. 이 두 환상의 공통 주제인 악과 악인에 대한 심판이 각각 어떻게 묘사되어 있습니까? (4, 8, 11)
ð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에서는 도둑질 하는 자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망령되게 맹세하는 자의
집을 나무와 돌과 함께 사른다고 말씀했습니다(4절). 새번역 성경은 “나무 대들보와 돌로 쌓은 벽까지, 그 집을 다 허물어 버릴 것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철저하게 파괴하여 악을 행한 자가 거할 곳이 없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반면 에바 속의 여인 환상에서는 악을 철저히 격리시키는 모습이 나옵니다.
에바 속에서 나오려는 악을 다시 그 속으로 던져 넣고 무거운 납 뚜껑으로 그 위를 덮어 버려 에바 속에 악을 완전히 가두어 봉인합니다(8절).
뿐만 아니라 그렇게 악이 봉인된 에바를 하늘과 땅 사이, 즉 공중으로 들어 올려 시날 땅으로 옮겨 버립니다(11절) 시날 땅은 성경에서는 바벨탑이
지어졌던 곳으로 불순종과 반역의 원산지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역사적 상황에서는 바벨론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힘들게 했던 악을 봉인해
다시 그것의 원산지인 바벨론으로 돌려 보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집을 지으려 함이니라. 준공되면 그것이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라는 말씀을
악을 용인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이 말씀은 악을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보내 격리시킨다는 의미입니다.
ð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은 악을 멸하는 것으로, 에바 환상은 악을 봉인해 격리하는 것으로 악에
대한 심판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묘사는 서로 다르기도 하지만, 예루살렘에서는 더 이상 악인과 악을 찾아 볼 수 없게 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와 유다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계획에는 그곳에서 악을 제해 버리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2.
이렇게 철저한 심판을 받게 된
악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 구체적 범죄들은 어떤 죄들을 대표할까요? (3, 4, 6)
ð 먼저,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의 경우 도둑질하는 자와 맹세하는 자가 언급됩니다(3절). 맹세하는
자의 경우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라고 4절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이 두 가지 죄는 모두 십계명에 들어가
있는 것이며 각각 사람에 대한 죄악과 하나님에 대한 죄악으로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신경 쓰시는 것이 단지 이 두 가지 구체적인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것 보다, 이 두 가지 죄악이 각각 사람과 하나님을 거스리는 죄악으로 사람들이 범한 모든 죄악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범한 모든 종류의 죄악을 심판하십니다.
ð 에바 환상에서 악을 상징하는 존재가 왜 에바에 들어가 있었는지에 대해서 도량형을 속였던 경제적인
죄를 상기시킨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아모스 8장 5절을 보면 부정한 이익을 보기 위해 “에바를 작게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에바를 작게 만들면
적은 곡식으로도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경제적 속임은 가난한 자에게 피해를 입혔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아모스 8장 6절에서는
“신 한 켤례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라는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 없는 자들을 망하게 하려는 자들”(암 8:4)의
속 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ð 에바는 보통 20리터쯤을 담을 수 있는 도량형입니다. 5장의 환상에서는 여인이 그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 보다 더 큰 크기의 에바일 수도 있고, 들어가 있는 여인이 성인의 크기가 아니라 고대 근동에서 많이 출토되는 작은 신상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든 9절은 그 존재가 에바에 갇히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에바가 도량형을 속인 죄 때문에 사용된
것이라면 악이 자신이 사용했던 도구에 갇히는 역설을 볼 수 있습니다. 악은 잠시 성공하는 것 같더라도 결국은 스스로를 망하게 할 것입니다.
3.
이러한 악인과 악에 대한 심판이
예루살렘의 회복을 보여주는 환상들 중에 포함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출 34:6-7; 수 24:19; 계 21:4)
ð 이 질문에 대해서는 스가랴 본문만 가지고서는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성경 전체를 통해 이해할 때 답할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자비로우실 뿐 아니라 죄악은 분명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거룩한 사랑으로
질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다른 신을 섬기는 악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눈물, 사망, 애통, 곡하는
것, 아픈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경험하는 고통과 슬픔의 많은 부분은 악과 악인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참된 회복은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구원의 측면과 더불어 자기 자신의 죄를 버리고 또한 죄악의 압제에서 해방되는 심판의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이 보여주는 악에 대한 심판은 궁극적으로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완성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는 악의 심판이 더디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 삶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와 악들을 피하고, 없애고, 쫓아버려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거부하는 악의 사회적 측면을 간과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공평과 정의의 심판을 소망하며 살아야겠습니다.
로잔 언약 5항은 하나님이 창조주여 동시에 심판자이심을 고백하며 하나님이 심판자이시라는 사실이
우리의 삶에 주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창조주요 동시에 심판자이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사회 어느 곳에서나 정의와 화해를 구현하고 인간을 모든 종류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관심에 동참하여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종, 종교, 피부색, 문화, 계급, 성 또는 연령의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은 천부적 존엄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누구나 존경받고 섬김을 받아야 하며 착취당해서는 안 된다. . . . 구원의
메시지는 모든 소외와 억압과 차별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과 불의가 있는
곳 어디서든지 이것을 고발하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로잔언약 5항
중에서)
l 삶을 향하여
1.
하나님은 분명 악인을 심판하시고
악을 처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심판이 바로 바로 벌어지지는 않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라고 있으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악에
대한 심판이 있습니까? 어떤 악을 하나님께서 처리해 주시기를 바라는지 나누어 봅시다.
ð 악의 심판을 바라는 것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의
통치에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참된 영성은 분별과 용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각을 가지고 세상에서 벌어지는 여러 일들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중요한 영성입니다. 올바른 분별을 위해 성경의 지혜와 세상의 지식으로 잘 준비하고 갖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더불어 =공동체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처리해 주시기를 바라는 악은 내가 생각하는 악인지 진정 신앙의 기준에서 볼 때 악인지 분별을 서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2.
하나님께서 악을 처리하실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구하며 살아가는데 어떤 격려를 줍니까?
ð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도, 그것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내는 것에만 우리 삶의
의미를 둔다면 우리는 그것을 방해하는 우리 안의 죄와 우리 바깥의 악으로 절망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성공이 아니라 신실함이기 때문에 성공 유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우리가 신실하기를 바라시며, 우리의 성공을
방해했던 죄와 악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처리하시며 우리의 실패를 위로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처리하실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악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능력의 한계로 인해 좌절에 깊게 절망하지 않고 신실한 순종을 계속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악으로 인해 생기는 고난과 고통을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을 믿기에 현재의 고난을 인내하며 하나님 나라를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