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16일 소그룹 나눔 문제 해설
11월 16일(주일) 소그룹 성경 나눔
올바른 관계를 맺는 방법
신명기 22:9-12
l 흐름 살펴보기
19장부터 26장에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일상에서 유념해야 하는 여러 규례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주제라면 일상에서의 올바른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올바른 관계’는 구약 성경에서 흔히 “공의”라고 번역되는 히브리 단어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천하 가운데 이스라엘이 특별한 까닭은 그들 가운데 이루어지는 공의로운 삶, 올바른
관계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올바른 관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이웃과 맺는 올바른 관계, 그리고 피조 세계와 맺는 올바른 관계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가운데서 농사 지을 때에 유념해야 하는 몇 가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기억할 것은 농사 지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부분 역시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찾으시는 올바른 관계의
대상이라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신앙은 성전이나 교회당 안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드러난다 할 것입니다.
l 말씀 속으로
1. 9절은 포도원에 두 종류의 종자를 섞어 뿌리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섞어 뿌려 얻은 결실은 어떻게 처리됩니까?
ð 이 짧은
명령이 이스라엘에게 필요했던 종교적, 문화적 배경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추측하기를, 같은 밭에서 더 많은 것들을 얻기 원하는 실용적인
욕심을 금지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배운 농사의 관행이라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미신적이고 마술적인 효과를 기대한 행동이라 주장하기도 합니다.
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농법을 금지하십니다. 만일 금지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행동할 경우, 그들은 그 땅의 소산을 다 빼앗기게 됩니다. 이 때 ‘빼앗긴다’는 표현은 전쟁이 났을 때 전리품으로 모든 것을 빼앗기는
상황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기대하시는 삶은 ‘구별됨’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면 자신들에게 주어진 율법적인 삶의 양식에 가나안의 다른 것들을 접목하고 싶은 유혹을
받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단호히 그런 혼합적인 문화를 거부해야 합니다. 아무리 당장 실용적인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눈
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무너뜨릴 때, 이스라엘은 모든 것을 빼앗길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2. 10절은 소와 나귀를 동시에 멍에 메워 밭 가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며, 11절은 양 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도록 명령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소와 나귀를 함께 멍에 메우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를 곰곰이 생각해보면서 하나님께서 이러한 금지 명령을
내리신 까닭은 무엇일지 잇달아 생각해 봅시다.
ð 소와 나귀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농사에 이용되는 가축이었습니다. 당연히 소는 크고 힘이 강한 가축으로서 농사를 위한
최고의 수단이었습니다. 나귀는 그에 비해 작고 약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직접 일하는 것보다는 나귀를 이용하는 것이 낫기에, 나귀도 밭을 가는데 이용되었습니다.
ð 소로만 농사를
지을 수 있다면 농부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가 충분하지 않아 나귀를 사용해야
할 경우, 소와 나귀를 함께 한 멍에를 지게 하는 것이 일의 효율 면에서 더 낫습니다. 사람과 가축을 막론하고 자신의 한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게 되면 일을 그만하려 하기 마련입니다. 당연히 나귀가 먼저 자신의 한계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때 옆에 있는
소가 묵묵히 일을 하면 나귀는 자연스레 자신의 평소 한계보다 더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나귀가
소의 보조를 맞춰주지 못하면 소로서는 노동의 효율이 떨어질 수도 있지만 소로서도 혼자 하는 것보다는 나귀와 함께하는 것이 낫습니다.
ð 한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는 것이 더 효율적임에도 불구하고 효율성 보다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보존하는 문화를 확립해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원리가 여기에도
나타납니다. 특히 일의 효율을 위해 나귀가 소와 한 멍에를 지고 자신의 힘에 부치는 일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도 여기서는 거부됩니다. 나귀는 나귀의 수준에 맞는 일을 해야 하며 소는 자신의 수준에 맞는 일을
해야 합니다. 주인의 효율성을 위해 나귀와 소의 구별이 무너져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자는 약자대로 자신의 일을 즐거이 하기를 원하십니다.
3.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다는 까닭은 무엇일지 아래에 인용된 민수기 15:37-40을
읽어 보고 이야기해 봅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 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ð 이스라엘은
이 땅과 구별된 문화를 만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율법은 제사 뿐만 아니라 경제적 관계, 국가 제도적 문제, 식생활 등등,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내용들을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은
또다시 형식에만 치우쳐 그 율법의 목적은 잊어버린 채 교만하고 자기 중심적인 문화를 만들어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위한 또 하나의 표식을 마련하도록 하십니다.
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외적으로 구별되는 몇 가지 행동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외적인 모든 것들은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돕는 것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형식과 제도에
치우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9-11절은 두
가지를 섞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한꺼번에 사용하여 더 큰 수익과
효과를 얻고자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번에 한 가지를 사용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각자의 고유한 영역이 존중되고, 각자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추위를 피하고 몸을 가리기 위해 늘 입는 겉옷에 술을 달아두는 것은 일상의
모든 영역을 통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종은 그야말로
삶의 모든 부분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l 삶 속으로
1. 두 가지를 동시에 하지 말라는 말씀을 오늘 우리가 어떻게 적용하며 지킬 수 있을지,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과 연관하여 생각해 봅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ð 오늘날 우리의
삶은 참으로 분주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그 밖에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모든 관계들 속에서, 나는 수많은 책임들을 감당하기 위해 분투합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우리는 어떤 일이 어떤 의미와 목적이 있는지도 음미하지 못한 채 내 앞의 일들을 처리하기에 급급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습니다.
ð 이런 현실
속에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도저히 불가능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요구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일깨웁니다. 나의 일상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기가 매우 쉽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삶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항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섬기는데 매우 익숙하다는 것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ð 오늘날 완전히
다른 삶의 문화를 만들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적어도 이 땅의 문화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도록 부추기고 있을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영적인 분별력을 발휘하여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속에 스며든 우상숭배를 가려내어야
합니다.
2. 구약 때에는 그 말씀을 기억하기 위해 옷단에 술을 달고 집안 기둥에 상자를 매달고, 얼굴
미간에 표시를 했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말씀을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것들은 모두 하나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었습니다. 문화는 정신을 담을 때
가치 있는 것인데, 문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때에는 아무리 새로운 문화라 하더라도 우리를 새롭게 하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해 어떤 제도와 절차가 필요한지 고민하며 찾아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도와 절차가 한 번 확립되었다고 해서 그것만을 통해 거룩해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중심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구별된 문화와 우리의 중심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신앙의 다음 세대에게 계속해서 설명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ð 예를 들면, 우리는 소그룹원들에게 세상과 다른 ‘기독교적 문화’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기록해보게 하고, 그런 것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토론해보는 시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확립되어 온 기독교적 형식의 유익을 누리기 위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보완책이 필요한지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잘 드러내주는
핵심적인 성경 구절을 암송하는 것은 더 없이 좋은 수단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