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큐티 3월 8일 소그룹 나눔 문제 해설
3월 8일
하나님의 약속과 사람의 순종
수 14:6-15
l 흐름 살펴보기
정복 전쟁이 마치자, 곧바로 온 이스라엘은 정복한 땅의 분배라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이방 민족에게 승리를 거두는 것만이 아니라, 정복한 땅을 나누어 정착하는 것까지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14:5이 분명히 언급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과 같이 행하여 그 땅을 나누었더라”. 땅을 분배할 때 가장 먼저 분배 받게 된 지파는 유다
지파인데, 그 가운데서도 유다 지파에 속한 갈렙이 가장 먼저 땅을 얻습니다.
l 말씀 살펴보기
1. 6절에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이름이 모두 나타납니다. 이 두 사람이 모두 연루된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사건이 무엇이며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민 14장).
ð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인들 중에서 출애굽 사건을 경험한 ‘유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출애굽을 경험한 세대는 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40년 간의 광야 생활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지 두 사람이 장수했기 때문이 아니라, 출애굽 세대 중 이 두 사람 외에는 모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선언 때문이었습니다(민14:29-30). 하나님의
이 선언이 내려진 계기가 바로 가데스바네아 사건입니다.
ð 가데스 바네아는
시내산(호렙산)에서 11일
걸리는 거리에 있는 장소로서, 가나안에 곧바로 진입하려던 이스라엘이 진을 치고 있던 곳입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경험한 뒤 3개월이 걸려 시내산에 도착했습니다(출19:1). 그곳에 머물며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은, 출애굽 제2년 2월 20일에 출발하여(민10:11) 곧바로
가데스바네아로 향하였습니다. 가데스 바네아는 가나안으로 진입하기 위한 가장 가까운 길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곳에서 이스라엘은 각 지파에서 뽑힌 12명의 정탐꾼을 보내어 그 땅을 살피게 했습니다(민13:1-20). 사십일 동안(민13:40)
그 땅을 탐지한 그들은 한 목소리로 과연 그 땅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보고합니다(민13:27). 그러나 그 땅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은 강하고 그 성은
견고하여서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의 온 회중은 여호와를 원망하며 애굽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때 정탐꾼들 중 여호수아와 갈렙은 안타까워하며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리라고 그들을
설득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아무도 그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돌로 쳐 죽이려 하였습니다(14:10).
그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앙에 진노하시고, 그 불신앙대로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끝까지 믿음을 보인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그 땅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민14:26-38)
2. 갈렙을 평가하는 매우 중요한 표현이 ‘하나님께 충성하다’(수 14:8) 혹은
‘하나님을 온전히 좇다’(수 14:14)라는 말들입니다. 우리는 갈렙의 이야기를 보면서, ‘충성’ 혹은 ‘온전히
좇음’이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의 모습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ð ‘온전하게 뒤따르다’라는 표현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이 표현은 갈렙의 이야기 외에 단 한 번 성경에 등장합니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음 같이 좇지 아니하고”(왕상11:6)
ð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온전히 좇는 것을 예배 참석이나 헌금 등의 종교적 행위로 제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갈렙과 다윗을 향한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다’는 평가는 한두
번의 행동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85세가
되도록(10) 하나님의 언약을 향한 신뢰와 순종, 그리고
열정이 사라지지 않은 갈렙의 일생을 향한 평가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일시적인 헌신으로 놓고 보자면 솔로몬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그의 일천 번제와 성전 건축은 웬만한 신앙인은 꿈도 꿀 수 없는 대단한
종교적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솔로몬도 우상숭배에 빠져들면서 ‘여호와를 온전히 좇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ð 하나님을
온전하게 좇는 삶, 하나님께 칭찬받는 삶은 눈에 보이는 화려함을 기준으로 평가받지 않습니다. 수십 년을 이인자로 살아가더라도, 평생에 걸쳐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비하심을 의지하는 겸손한 일상의 삶이 진정한 하나님 백성의 삶입니다.
3. 갈렙은 가장 먼저 기업을 분배 받게 되었습니다. 어디든 그가 원하는 곳이며 갈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갈렙이 요청한
땅은 어디입니까?(14:12-13) 그 땅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ð 갈렙이 지목한
땅은 ‘헤브론’이었습니다.
헤브론은 예루살렘의 남남서편 30km에 위치한 곳으로서 지중해면보다 927미터나 높은,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높은 도시입니다. 그 곳은 애굽 소안보다 7년이나 일찍 세워진(민13:22) 유서 깊은 장소입니다.
특히 그곳은 아브라함이 오랫동안 체류했고, 사라가 죽었을 때 헷 족속으로부터 매장지로 그
땅의 일부를 구입하여 가족묘로 삼은 곳이기도 합니다(창23장). 그 묘지에는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가 묻혔습니다. 그리고
1번에서 언급한 가데스바네아 사건(민23장)에서 열두 정탐꾼이 탐색했던 땅이 바로 헤브론 지역이기도 합니다. 정탐꾼들은
그 땅을 차지하고 있는 아낙(거인족) 자손들을 보고서 겁에
질려 온 이스라엘이 불신앙과 불순종에 빠져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이끈 가나안 정복전쟁에서
헤브론 왕 호합이 여호수아에게 죽임을 당하기는 했지만(수10:1-27)
여전히 그 성에는 아낙자손들이 강력한 저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성은 ‘기럇아르바’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그
이름의 의미는 ‘아르바의 성읍’이라는 뜻입니다. 아르바는 아낙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영웅이었는데, 그의 이름을
따라 이 성을 지었다는 것은 헤브론이 얼마나 강력한 아낙 성읍이었는지를 시사합니다. 이런 역사와 의미를
가진 헤브론을 차지하는데 갈렙만한 적임자가 또 있을까요?
l 삶을 향하여
1. 여호수아서는 전쟁이 그쳤다고 말하지만, 전쟁은 계속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모든 땅을 정복한 것처럼 보이고
땅을 분배하지만, 여전히 그 땅에는 이방 민족이 남아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성읍이 크고 견고하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서가 말하는 전쟁 종식 선언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 사실은 나의 삶에 어떤 도전을 줍니까?
ð 여호수아 11장23절은 가나안의 온 땅이 취하여졌다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민족 아낙 사람들은 여전히 강력한 성을 갖춘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도자 여호수아를 통해 주신 승리는 놀라운 사건이었지만, 각 지파들이 실제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얻기 위한 노력까지 면제해주는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말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아무런 노력도 희생도 치르지 않는 어떤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일상을 복종시키는 각개전투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또다시 외롭고 불안한 상황에 놓인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큰 단위의 전쟁에 이미 승패가 갈렸다는 것을 알고 작은 단위의 전투에 두려움 없이 임해야 합니다. 삶의 거친 현실은 그대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이루어진 승리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사람은 담대하게 현실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믿지 않을 때의 삶과
믿을 때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지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이야기해 봅시다. 특히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현실은
어떤 것이며, 그리스도의 승리를 믿는다는 것이 이 현실에 대한 나의 생각과 감정을 어떻게 바꾸어줄 수
있을지 이야기해 봅시다.
2. 기업으로 얻은 땅인데 거기서 이방 민족을 몰아내야 하는 과제가
있다는 점은, 하나님의 약속과 믿음의 순종이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순종이 없는 약속은 어떻게 될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무관한
‘순종’은 어떻게 될까요?
ð 성경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수호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왕이시며, 이 세상을 통치하시면서 우리에게 그 통치에 참여하라고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온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였습니다(창1:26). 그런데 우리가 그런 영광스러운 대리통치를 수행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에
대한 순종입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ð 만약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하게 통치권을 행사하려 한다면 그것은 대리통치가 아닌 반역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지 않은 채 상황 논리나 자기 감정에 따라 행동하면서도 그것을 ‘순종’이라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ð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만 방치하고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관습을 따라 행동하면서도 ‘순종’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행동들이 어떤 열매를 맺게 될 지 이야기해 봅시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그런 모습은 없는지 이야기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