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큐티 2016년 2월 7일 소그룹 성경 나눔 해설

27(주일) 소그룹 성경나눔

양심을 일깨우는 하나님나라

집필: 김정태 목사
요한복음 753 - 811

흐름 살펴보기


초막절 행사가 모두 끝난 후 사람들은 다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으로 되돌아가셔서 기도하고 주무셨습니다. 다음 날 아침 예전처럼 다시 성전에 들어와 그들에게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이 날도 어김없이 바리새인들과 치열한 논쟁이 벌어집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은 늘 격렬한 논쟁이 뒤따랐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놓은 가장 좋은 덫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 덫을 빠져 나가실까요?

성경 속으로


1. 예수님을 덫에 걸리게 하려고 음행 중에 잡힌 여인을 데려온 이들은 누구입니까?(3) 그들은 어떤 교리를 가지고 있었나요?

그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많은 서기관들이 바리새파 출신이므로 통칭해 바리새인들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5개의 당파가 각축을 벌였습니다. 성전을 둘러싼 제사장 중심의 사두개파, 동굴에 은거하며 성전 정화를 열망하던 에세네파, 성전을 지은 헤롯 왕을 지지하며 권력을 누리던 헤롯파, 성전을 모독한 로마에 항거하는 무장 독립운동을 하던 열심당이 그들입니다. 이 네 당파들은 모두 성전을 중심으로 활약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당파인 바리새파는 달랐습니다. 바리새파는 평신도들이 중심이 된 종교개혁운동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이 아닌 율법에 대한 철저한 순종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철저한 순종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유대인들에게 독립을 가져다 줄 것으로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 하듯 금식과 기도와 구제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율법에 대한 열심 때문에 후에 예루살렘 성전이 망한 뒤 유일하게 살아남은 당파는 바리새파입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유지되던 다른 네 개의 당파는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그토록 싫어했던 것은 그들이 꿈꾸는 하나님나라와 예수님이 꿈꾸는 하나님나라가 서로 비슷하면서도 충돌했기 때문입니다. 비슷하니까 경쟁이 생기고 다르니까 충돌했습니다. 먼저 유사점이 있다면 두 운동이 모두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율법에 대한 해석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조문에 천착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율법뿐 아니라 그 후 생겨난 부속규정들까지 다 율법이라 여겨 지키고자 했습니다. 더 나아가 이것들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죄인이라 규정하고 공동체에서 축출하려 했습니다. , 율법을 못 지키는 죄인을 뺀 하나님나라를 꿈 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근본정신을 부활시켰습니다.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위해 주어진 율법이 도리어 하나님과 이웃의 관계를 파괴하는 현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형식적 조항을 폐하고 본질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들을 스스로 찾아가 하나님나라로 불러 모으셨습니다. 삭개오, 음행한 여인 등 바리새인들이 버린 모든 죄인들을 불러 모아 잔치로 초대했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회개에 이르도록 한 후 이들 모두를 포함한 하나님나라를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바리새 운동은 율법 지키는 이들만을 위한 선민의 운동이 될 것이고, 예수님의 운동은 모든 인류를 다 포괄하는 운동이 될 것입니다. 어느 것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일까요? 당연히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입니다. 이 결정적 차이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용납하지 않고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그토록 미워하였던 것입니다.

2.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덫에 빠뜨리려 한 질문은 무엇입니까?(4-5) 이 질문이 왜 예수님에게 위험한 것이었을까요?(참고: 20:10, 22:22 )

바리새인들은 음행 중에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데려 왔습니다. 레위기 20:10, 22:22에 따르면 그 여인은 즉각 돌로 쳐야 합니다. 그러나 여인만 돌로 치면 안됩니다. 위 구절들은 음행 당사자 둘 다 즉 남자와 여자 모두를 즉각 돌로 치라고 합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남자는 풀어주고 여자만 데려왔습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힘 있는 남자들은 봐주고 가장 연약한 여성을 증오의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 보아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시행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로 치지 말라고 하면 율법을 거부하는 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러 오셨습니다. 죄에 대해 모른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할 능력을 갖고 오셨습니다. 그렇기에 음행의 죄를 모른 척 하면 율법 자체를 폐기하는 것이 되고 이것은 신성모독의 범죄에 해당합니다. 이 또한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일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돌로 치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자신이 선포한 하나님나라의 말씀과 자신이 행한 사랑의 행위를 무효화시킵니다. 세리와 죄인까지도 초대하는 하나님나라가 바로 예수님의 복음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삭개오도 초대하고,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도 고치고, 왕의 신하의 아들도 고치고, 사마리아에서 우물가 여인과도 이야기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금 돌로 치라는 한 마디에 무너지게 됩니다. 예수님도 지금 바리새인의 하나님나라에 굴복하느냐 아니냐 기로에 선 것입니다.

3. 교묘한 바리새인의 함정에서 탈출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택한 해법은 무엇입니까?(6-7)

예수님께서는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준수하시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나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을 지키되 판결할 권한이 군중들에게 없다는 것을 알리셨습니다. 처음 율법을 주시던 시대는 모두가 율법을 능히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30:11-14). 그러나 예수님 당시는 너무도 타락하여 누구도 온전히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모두가 죄인이면서 자신은 죄인이 아닌 것처럼 특정한 사람을 비난하고 처형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쓰긴 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신명기의 말씀들을 쓰셨든지, 앞에 있는 이들의 숨겨진 죄 목록을 적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땅에 쓰신 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 권위 있게 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4.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청중들의 반응은 어떠했나요?(9) 그리고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무엇이라 하셨나요?(10-11)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청중들은 양심에 가책을느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여론 조작과 음흉한 사주에 따라 돌을 들었던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찔려 율법의 진실을 알게 됩니다. 율법이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 제정된 것임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가장 놀라운 것이 바로 이 양심에 찔린 군중들의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어른에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모든 이들이 다 동일하게 양심에 찔려 돌을 내려 놓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의 양심을 찔리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 양심을 찔려 돌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의 원래 자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여인을 바라보시며 나도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군중들이 돌을 들었을 때 이미 죽었습니다. 이미 마음속으로 죽었던 여인을 다시 죽이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경험한 이 여인에게 새 출발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은 죽음까지 인도하여 죄를 깨닫게 합니다. 그러나 죄를 깨닫게 된 사람을 다시 살게 만드는 것은 못합니다. 그것은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시켰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예수님 안에서 긍정적인 역할만 하고 부정적인 역할을 못하게 되었으니까요. 예수님 안에서는 언제든 누구든 어떤 죄를 범했든 새 출발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 하지 않으시니 우리도 다른 이들을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삶을 향하여

1. 우리는 때로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다른 사람의 죄를 더 부각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시 그런 경우를 알고 계시다면 함께 나누어 보세요.

개인적인 경험도 분명 있을 테지만 그것은 너무 은밀한 이야기가 되어 나중에 서로 부끄러울 수 있습니다. 가급적이면 사회 뉴스에서 찾은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나라의 뉴스를 보면 어김없이 이런 일들이 반복됩니다. 몇 달 전 지하철에서 매너 없이 행동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인터넷과 SNS에 게시되자 사람들이 득달같이 달려 들어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신상을 조사해 인터넷에 공개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행동이 그렇게까지 비난받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경우가 다르지만 각기 자기 삶에서 더 부끄러운 일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사회는 자기의 죄를 숨기기 위해 작고 사소한 이들의 죄에 대해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정치권은 더욱 심합니다. 자기 편 사람들의 범죄는 철저히 숨겨줍니다. 엄청난 부정과 부패를 저질러도 제대로 된 조사도 한번 하지 않고 무마해버립니다. 그러나 상대편의 흠집에 대해서는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인격까지 말살하며 공격합니다. 이렇게 양심을 버리고 뻔뻔하게 행동하는 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릴 때 했던 똑 같은 행동입니다.

2. 양심을 일깨워 사형집행을 멈추신 예수님의 방법은 매우 놀랍습니다. 폭력과 힘으로 강제하지 않는 하나님나라를 믿는 우리는 어떻게 이 시대의 양심을 깨울 수 있을까요?

인도의 독립운동을 이끈 간디의 비폭력무저항 운동은 영국인의 양심을 일깨우는 데 초점이 있었습니다. 만약 영국이 기독교적 기반위에 서 있지 않았던 나라라면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도 실패로 돌아갔을지 모릅니다. 영국인들이 믿는 산상수훈을 무기로 하여 영국에 맞섰던 간디의 지혜로움도 위대하지만, 그 운동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던 영국의 뒤늦은 반성도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또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흑인 민권운동도 미국 백인 기독교도들의 양심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죄 없는 흑인들이 겪는 차별과 고통과 죽음을 보며 백인들이 괴로워하도록 그들이 숨겨진 양심을 끝없이 흔들어 댄 것이 민권운동이 열매를 맺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도 일본의 양심을 일깨우려 애를 썼습니다. 3.1운동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다른 제국들보다 훨씬 상황이 나빴습니다. 흔들릴 양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걱정거리는 점점 더 양심이 무디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누군가 자기 목숨을 희생시켜 무언가를 주장하면 불편하지만 귀 기울여 들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노력도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나라를 꿈꿀까요? 힘으로 강제하지 않고 양심을 일깨우고 마음에 감동을 주는 것만이 유일한 하나님나라의 방법이라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이 짊어져야할 고난이 무게가 더 가중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성령께서 도우실 것을 믿고 간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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