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큐티 2016년 9월 11일 소그룹 성경 나눔 해설
9월 11일 소그룹 성경
나눔
복음이 배척받는 이유
고후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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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 살펴보기
바울은 자신에 대한 의심에 빠진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이것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나 친구를 잃기 싫은 정도의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바울을 배척하게 된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필연적으로 행할
수 밖에 없는 삶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바울 개인을 향한 배척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에
대한 배척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영적 권위를 입증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증거를 제출하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물론 바울은 마음만 먹으면 그런 것들을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끝까지 거절하며 꿋꿋이 복음에 대한 신념대로 접근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율법으로 대변되는 옛 직분의 사도가 아니라 성령으로 대변되는 새 언약의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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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으로
1. 바울은 자격을 입증하라는 요구 앞에서, 각 사람들의 양심에 대하여 자신을 추천한다고 선언합니다(2절). 그렇다면 사람들의 양심이 이미 알고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자신의 자격은 무엇입니까? (1,2절) 이것들을 주목하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바울이 주장하는 자신의 사도적 자격의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자신이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직분을 받았다는 사실(1절), 두번째는 다른 어떤 인간적인 수단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진리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2절).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바울에게 사도적 자격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이유는 그들이 바울이 하나님의 세우심을 받은
사도인지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요구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거나, 말씀을 거슬러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 마땅히 이런 문제제기는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마땅히 그런 요구에 응해야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와 바울의 관계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그 어떤 교리적, 도덕적인 문제도 없었습니다. 그의 삶과
그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십자가의 진리에 충실했습니다. 문제는
그 진리가 이 세상의 가치와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을 가진다는데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 안에서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한없이 낮아지는 바울의 모습은 지극히 영광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의 문화
안에서는 자기과시적이지 않은 태도, 세상의 가치와 경쟁하지 않는 태도가 받아들여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을 향한 고린도 교회의 문제제기가 가진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따라 바울의 사도성을
검증하려 한 것이 아니라, 대도시 고린도의 문화를 따라 그것을 검증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만족시키려면 바울은 2절이 이야기하는 ‘숨은 부끄러움의 일’, ‘속임’,
‘말씀을 혼잡하게 함’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과감히 그런 길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과
‘진리’를 통해서만 자신의 사도성을 변호하기로 한 것입니다. 바울은 오직 고린도 교인들의 양심만이 이것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2. 바울은 사람들의 양심을 향한 자신의 자격 입증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바울의 그런 삶의 모습들은 영적 권위의 근거로서는 부적합하다고 반박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바울은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3절) 그렇게까지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참조. 4, 5절)
=> 사람들은 이런 방식의 변호를 조롱할 수도 있습니다. 대도시 고린도의 성공주의에 따르면 이런 이야기는 결국 항복 선언이나 마찬가지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라고 이런 분위기를 모를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자신이 가르침과 삶으로 드러내는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망하는 자’라고 반격합니다.
‘망하는 자’, 곧 ‘멸망의 길에 있는 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주는 생명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살후2:10). 그들이
바울의 가르침과 삶을 거부하는 이유를 바울은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 세상의 신’에 의해 혼미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4절). ‘이 세상의 신’이란
사탄을 의미합니다. 사탄이 ‘이 세상의 신’이라 불리는 이유는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사탄의 통치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사람들을 타락시킨 사탄은 그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반(反)하나님 나라적 가치 체계가 더욱 발달하도록 조장하고 기만합니다. 세상의 신은 인간이 하나님이 아니라 힘과 풍요와 쾌락을 통해 인간다운 삶, 곧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속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문화 속에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추구하며 수고하지만
결국 그것은 ‘세상의 신’ 사탄을 숭배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사탄적 통치 안에서 혼미하게 된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변혁적인 가르침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어리석고 비천하게 여기며 배척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은 세상의 신이 다스리는 방식, 즉 인간이 스스로를 높이며 자신을 전파하는 길을 거절합니다(5절). 그는 인간이 스스로를 높일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자리에까지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높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종되신 분을 주로 높인다는 것은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심지어 바울 자신은 그 예수를 위하여 사람들의 종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여전히 세상의 신의 통치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3.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을 어떤 사건에 비유하고 있습니까? (6절) 이
두 사건을 연결지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바울은 자신을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빛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태초의 빛의 창조에 비견되는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던 때, 하나님 통치의 질서는 빛과 어둠을 나누신
첫째 날에 본격적으로 나타났습니다(창1:1-5). 하나님께서
뜻을 품으시고 명령하지 않으셨다면 세상에 빛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빛을 통해 세상은 우리에게 밝히 드러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신, 세상의
가치로 혼돈하고 공허하던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비추신 빛으로 진리를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에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이 어리석고 비천하게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시면 그 길에 하나님의 영광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신비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고, 세상의 영광과는 거리가 먼 겸손과 사랑의
삶을 사시다가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 그리고 그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구원의 본질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이야기와는 너무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참된 복음을 거부합니다. 사람들이 사로잡혀 있는 것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사탄의 가치관이기 때문입니다.
l 삶을 향하여
1. 나는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내가 들은 복음은 사도 바울의 태도와 얼마나 부합합니까? 나의 복음은
바울의 대적자들의 가치관과 더 가깝지는 않습니까?
2.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만드는 세상의 가치관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그런 가치관들은 과연 나와 우리 사회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