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큐티 2016년 3월 27일 소그룹 성경 나눔 해설
3월 27일(주일) 소그룹 성경 나눔
승리의 십자가, 그리고 승리하신 예수님
요한복음 18:28-38
l 흐름 살펴보기
십자가 처형은 유대가
아니라 로마의 사형 방식이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투석형으로 예수님을 처형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십자가를 선택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두가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저주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에 대해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라고 설명합니다(갈3:13). 이는 신명기 21장 23절에서
죽을 죄를 범한 사람에게 가해지는 저주의 형벌을 언급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수치의 십자기였습니다. 유대의 마지막 통치 왕조인 하스몬 왕조의 알렉산더 얀네우스(BC103-76)는
자신과 충돌을 빚은 바리새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6천 명을 죽이고, 약
8백 명의 바리새인들을 십자가에 못박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란 공포를 의미하는 동시에 수치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승리의 도구로 만드십니다.
l 성경 속으로
1. 유대인들은 유월절 준비일에 예수님을 관정 앞으로 끌고가 빌라도에게 넘겨준 뒤 관정 밖에서 예수님의 유죄를 외쳤습니다. 이들이 이처럼 자신들은 빌라도의 관정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26절) 이들의 태도는 어떠한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ð 유대교 지도자들이 빌라도의 관정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것은 종교적으로 부정해지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31절)는 빌라도의 말을 보면 예수님을 데리고 빌라도에게 넘긴 사람들은 산헤드린의 유력한 사람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들 중에는 대제사장들도 있었습니다(19:6).
유대인들은 비유대인의 거처에 들어가는 것은 불결하다고 여겼습니다.
비유대인의 생활 습관은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일들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접촉은 자신들의 정결함을 보장받지 못하게 만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민9:6-12는 죽은 시체를 만진 자가 유월절에 참여할 수 없어서 한 달 뒤에 별도로 유월절을 지키게 된 규례를 들려 줍니다.
ð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려 노력하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무죄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거짓을 꾸며대는 자들이 유월절의 정결함을 지키겠다며 극도의 조심스러움을
보이는 것은 모순적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확인되지도 않은 이방인들의 부정함을 피하겠다는 정도의 열심을
하나님을 향해 품었더라면,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아보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율법이란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저
자기들의 의를 과시하는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2.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데려온 이유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함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31절). 하지만 요한복음은 이 또한 예수님의 말씀의 성취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의 형벌인 십자가 위에서 죽으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생각하신 십자가의 죽음와 유대인의
십자가 죽임은 어떤 차이를 가집니까?
ð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으니 빌라도가 사형을
언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로마 법을 따라 죽이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를 연구한 학자들 중에는 반대의
의견도 있지만, 산헤드린 공의회가 성전 모독과 신성모독의 경우에는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있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스데반 집사가 투석형으로 죽임을 당했고 그 자리를 주도한 사울이 법적인 책임을
지지 않았던 사실을 보더라도 우리는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데려온 것은 예수님을 로마법에 따라 처형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한 내용이
유대인의 왕으로 자칭하며 반란을 선동했는지의 여부였다는 것도 이런 이유였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로마의 손에 죽이려 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면 신명기 21:23의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라는 말씀을 따라 그가 메시아일 수 없다는 증거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ð 예수님께서도 유대교 지도자들의 계략을 다 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길을 그대로 걸으십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저주를 받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저주는 예수님의 죄로 인한 저주가 아니라
모든 인류의 죄로 인한 저주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십자가의 저주가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 저주가 생명을 주는 저주이고 부활로 이어지는 저주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3.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정치적인 죄(선동죄, 반란죄)가 있는지 알아보고자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이 질문에 무엇이라 대답하셨습니까? (36절, 37절) 왜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하나님 나라와 구원의 원리에 대하여 설명하셨을까요?
ð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 나라는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속한 나라라면 다른 나라들과 충돌하며 영역 싸움을 벌였겠지만, 그
나라는 존재방식이 전혀 다릅니다. 이어 ‘네가 왕이 아니냐’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님은 예수님의 왕권도 전혀 다른 본질을
가지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땅에 속한 나라의 왕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강제력으로 왕권을 행사하지만, 예수님의 왕권은 진리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를 통해 존재합니다.
ð 예수님께서는 사실 간단히 그 혐의를 부정하며 자신을 변호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가 관심을 가지는 그런 정치적 혁명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놀랍게도 주님의 나라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왕으로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면서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진리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ð 이 상황은 역설적으로,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빌라도를 재판하는 형국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진리의
왕으로 제시하신 이상, 빌라도는 그에 반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순간
빌라도는 ‘내가 유대인이냐’라는 말로 급히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예수님을 거절했고, 불의한 재판관의
전형이 되고 맙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이 진정한 진리의 왕으로서 항상 그 왕권을 행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4절에 예수님께서 저주의 십자가를 지신 이유에 대해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라고 설명했습니다.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저주가 아닌 승리의 축복이 되고, 우리에게는 축복의 십자가가 되는 이유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죽이려는
무리들을 당장 꺾으실 힘이 있으셨지만, 주님께서 원하신 승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l 삶을 향하여
1.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참된 승리로 고백합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교회에서도
‘승리’는 고난과 낮아짐이 아니라 힘과 부귀와 출세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그런 것들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하신 예수님으로 하나님나라의 통치 아래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처럼 예수님의 승리를
오해하는 경우는 없습니까? 교회가 이 승리를 누리는 옳은 자세는 무엇인지 나누어 봅시다.
2.
예수님은 놀라운 순종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순종이 무엇을 가져다 주는지
분명히 아셨기 때문에 자신의 권세가 아닌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하나됨과 사랑, 용서와 용납을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가
지녀야 할 순종의 자세는 무엇일까요?